의료에서의 신기술 확산

1900 1913 뉴욕 5번가

디지털 헬스케어를 들여다보는 사람으로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의료에서 디지털 헬스케어를 비롯한 신기술의 확산입니다.

의료계의 보수적인 속성과 헬스케어 산업의 복잡한 구조로 인해

신기술의 확산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 의료는 제품을 쓰는 사람 (환자, 소비자)와

쓰는 것을 결정하는 사람 (의사)와 거기에 돈대는 사람 (보험)이 모두 다르며

이들 모두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우 독특한 산업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혈당 측정계의 경우를 들어보겠습니다.

당뇨병 환자들이 자가 혈당 측정계를 사용해서 집에서 평소 혈당을 측정하고

의사는 그 결과에 바탕을 두고 당뇨병을 관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환자가 스스로 집에서 검사를 한다는 것은 아직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혈압계처럼 팔목에 뭔가를 두르고 버튼 하나 누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피’를 뽑아서 하는 검사를 집에서 한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과거에 혈당 측정계가 개발된 직후에 의료계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영문 위키피디아의 혈당 측정계 (glucose meter) 항목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북미 병원들은 십년 이상 입원한 당뇨환자에서 간이 혈당 측정계를 사용하는 것에 저항했다.

검사실 관리자들은 (정식으로 채혈해서 실시하는) 검사실 혈당 측정의 정확도가

혈당 측정계의 간편함보다 더 가치있다고 주장하면서

병원 내에서 혈당 측정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자가 혈당 측정계의 중요한 용도는 환자가 집에서 평소에 혈당을 측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고

위의 언급은 병원 내에서 이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사용하는 제품도 의료계에 수용되는데 상당한 시간과 난관을 거쳤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의료 기기들도 도입되는 과정이 순탄치 않거나

순탄했다 하더라도 지금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이유로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의료에서 신기술 확산과 관련된 요인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생각보다 녹록치가 않았습니다.

특히 실증적인 내용보다는 이 업계에 있는 분이면 대략이라도 알고 있을만한 내용을 잘 정리한  자료가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자료찾지 않기로 결심하고 제가 본 것 중 가장 내용이 좋았던 자료 두편의 내용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의료에서 신기술의 확산 속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많이 공유되는 그림 중에 아래의 그림을 보신 분들 많이 계실 것입니다.

1900 1913 뉴욕 5번가
1900 1913 뉴욕 5번가

 

두 사진 모두 뉴욕 5번가인데 왼쪽 사진은 1900년, 오른쪽 사진은 1913년에 찍힌 것이라고 합니다.

왼쪽 사진에서는 자동차가 단 한대 보이는 반면 오른쪽 사진에서는 마차가 단 한대 보이고 있어

자동차라는 신기술이 13년만에 뉴욕의 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만큼 신기술이 무섭게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사용됩니다.

 

앞서 다룬 것처럼 의료는 이렇게 빠르게 변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마침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데이터를 발견했습니다.

 Adoption of Medical Technology: The Hospital’s three decision systems라는

1985년 논문에 실린 그림입니다.

Medical technology diffusion
Medical technology diffusion

 

1970년대 전후에 개발된 12가지 신기술이

미국 위스콘신주 남동쪽에 위치한 25개 병원에 도입된 비율과 시간을 표시한 도표입니다.

태아 모니터, 초음파, CT 등 지금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제품 혹은 기술이 대부분인데

십여년에 걸처서 병원에 도입된 비율이 5~20%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변한 점도 있을 것이고

(미국 전역도 아닌) 위스콘신이라는 특정 주의 몇몇 병원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겠지만

의료의 기본 속성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눈여겨 볼만합니다.

 

다음으로 의료에서 신기술 확산과 관련된 요인을 분석한 책의 한 챕터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책의 제목은 Adopting New Medical Technology 입니다.

(링크를 따라 가시면 오른쪽에 ‘Download free PDF’ 아이콘을 누르면 간단한 가입 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의 5장이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데 제목이

‘Physicians’ decisions regarding the acquisition of technology’ 입니다.

챕터의 제목처럼 의사들이 신기술을 도입할 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입니다.

 

처음 언급되는 것은 기술의 성격 (Innovation Characteristics) 입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 현재 사용 가능한 것 대비의 효용입니다.

저자들은 (도입에 따른) 금전적인 인센티브가 동일하다고 할 때 혁신적인 기술이

따라하기 (me-too) 기술보다 도입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완전히 수긍하기는 힘든데 저자가 든 사례가

새로운 항생제 혹은 소아암에 대한 항암치료제 등인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또 한가지 생각해볼 기술의 성격은 신기술을 도입하기위해 필요한 병원의 자원, 역량입니다.

해당 기술을 도입하는데 필요한 자원이 적을수록 도입의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다른 요인이 동일하다면 저렴하거나 이익을 더 많이 낼 수 있는 제품

비슷한 결과를 낼 수 있는 기존 제품을 대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번째는 의료 공급자의 특성 (Provider Characteristics) 입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제공해야 하는데

의료비가 증가함에 따라 이를 낮추기 위한 역할을 해야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 것말고도 의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으로는 개인적인 기쁨을 최대화하려는 경향과

의료의 최선두에 섬으로써 생기는 혜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의사의 개인적인 특성이 신기술 수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나이가 젊을 수록, (나이와 무관하게) 전공 수련을 마친 기간이 짧을 수록 수용에 적극적이고

일반의 보다는 전문의가, 단독 개원인 경우보다 그룹 개원인 경우, 시골 보다는 도시에 일하는

의사가 적극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또, 학계와의 연관성이 있을 때 적극적입니다.

 

추가로 고려할 점은 시장 요인입니다. 정확히는 경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장 경쟁이 치열한 곳에 있을 수록 (예: 도시에 있는 경우) 수용에 적극적입니다.

 

세번째는 지식 (Knowledge) 입니다.

임상 시험을 통한 의학 지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우선 연구의 결과로 대리 결과 지표 (Surrogate outcome)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다룹니다.

대리 결과 지표를 사용하는 이유는

정말 알고 싶은 지표를 결과로 내세우고 연구를 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한 이유로

  1. 적절한 연구 지표가 마땅치 않은 경우
  2. 필요한 분석이 까다로운 경우
  3. 정말 알고자 하는 지표에 대한 결과를 알기까지 걸리는 시간, 비용이 큰 경우

를 들고 있습니다.

 

연구에서 대리 결과 지표를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면서 발생하는 이슈를 들고 있는데

급성 심근 경색에서 사용하는 혈전 용해제에 대한 것입니다.

과거 출시된 혈전 용해제들 간에 가격 차이가 10배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FDA 승인을 받을 당시 직접적인 비교 임상 시험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중 특정 약품이 (급성 심근 경색의 원인으로 생각되는) 관상 동맥 혈전을

더 빠르게 용해시켜 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이를 더 효용이 높다는 결과로 간주하였고 많은 의사들이 이 약을 처방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 약이 가장 비싸지 않았나 싶은데 정확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3가지 혈전 용해제들을 직접 비교하는 임상 시험을 했는데

3가지 모두 사망률이 비슷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왔음에도 미국 의사들은 이전부터 처방하던, 비싸지만 효용에서 차이가 없는 약을

계속 처방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리 결과 지표를 사용해서라도 빠르게 의미있는 결과를 내놓아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비지니스적인 관점에서 필요할 수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또 한가지 생각해 볼 점은

신기술 수용을 촉진하는 연구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편견 (Bias)가 작용하며

기존에 사용하던 기술을 중단할 것을 추천하는 연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편견이 있다고 합니다.

즉, 신기술 수용은 장기간 지속되는 영향이 있으며 이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네번째는 인식 (awareness) 입니다.

연구를 통해서 만들어진 지식이 의사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사들은 신의료 기술에 관한 정보를 수용 채널과 관련해서 각자 선호하는 것이 다르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와의 개인적인 교류로 얻은 지식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들어 공신력 있는 학술지가 아닌 일반 미디어 보도가

신기술 수용에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복강경 쓸개 절제술 (Laparoscopic cholecystectomy)의 경우 일반 미디어에 유용성이 보도되고

이후 환자들 사이에서 그 사실이 전해졌습니다.

환자 수요 증가와 병원간의 경쟁으로 인해

그 효용을 입증하는 임상 시험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빠르게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다빈치 로봇 수술이 빠르게 도입되는 과정을 떠오르게 합니다.

 

반대로 적절한 방식으로 정보가 전달되지 않으면서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 결과가 많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당뇨성 망막병증의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당뇨성 망막병증은 선진국의 실명 원인 1위이며 빨리 발견하면 적절한 치료를 통해서

실명을 예방하거나 발생 시기를 늦출 수 있습니다.

이를 증명한 연구가 1976년에 발표된 Diabetic Retinopathy Study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안과 저널에 발표되었고 당뇨병 환자 다수를 진료하는 1차 진료 의사들에게는

그 정보가 잘 전달되지 않아 당뇨병 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학술지가 신기술에 관한 정보 확산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내용을 제시하는 논문이 있어 여기서 잠시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How important is the scientific literature in guiding clinical decisions?라는 논문으로

MRI가 도입되기 전후를 케이스로 해서 학술 문헌이 기기 도입 결정을 내릴 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지를 실증적으로 다룬 논문입니다.

MRI diffusion
MRI diffusion

이 논문의 핵심은 위의 그림입니다.

MRI는 81년에 시판되었는데 그 전후로 출판된 MRI관련 논문과, 설치된 MRI 대 수,

그리고 다른 영상 기법과의 비교 논문 숫자가 그래프로 나와있습니다.

저자는 의사 혹은 병원이 새로운 영상 기법 (MRI) 도입을 결정하는데에

기존의 다른 검사와의 비교가 중요할 것인데

MRI 출시 초기에 이런 비교 논문이 많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MRI가 비교적 빠르게 시장에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특히 초기에 나온 MRI 비교 연구들은 연구 디자인이 적절치 않거나

참여 환자수가 적은 등, 과학적으로 충분히 유효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따라서, MRI는 잘 설계된 비교 연구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상당한 대수가 판매되어 설치되었으며 이는 CT에서도 나타났던 일이라고 합니다.

 

1970~1980년대의 일이기 때문에 지금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수도 있지만

좋은 학술 논문을 통해서 효용을 입증하는 것이

신의료기술 도입에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섯번째는 판단 (Judgement) 입니다.

신기술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 의사가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같은 지역에 있는 동료, 경쟁자의 태도이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규제 기관의 결정과 전문 단체 (학회 등)의 추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의사가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은

임상 시험 결과를 개별 환자에게 적용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임상 시험은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환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를 세세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 환자에게 적용해도 될 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여섯번째는 시범 사용 (Trial) 입니다.

‘기술의 성격’에서도 다루었던 것처럼 시범 사용해 보기가 얼마나 용이한 지가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예를들어 신약이 새로운 수술 장비보다 시범 사용해 보기가 용이합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역시 앞서 다루었던 시장에서의 경쟁이 있습니다.

환자들에게 유명해진 신기술의 도입이 느려지는 경우 시장을 잃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의료 사고 소송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산부인과가 의료 사고 소송 비율이 높아서 신기술 도입 속도가 느리다고 지적합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표준 치료 (Standard of care)로 받아들여지는 경우

엄밀한 과학적 근거가 없어도 신기술이 빠르게 도입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사례로 fetal monitoring을 들고 있습니다.)

 

일곱번째는 수용 (Adoption) 입니다.

수용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보험 적용 여부 및 수가입니다.

보통 no pay, no play 원칙이 적용된다고 합니다.

보통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면서 수용되지 않는 것을 생각하기 쉬운데

높은 수가를 적용받으면서 빠르게 수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드는 것이 복강경 쓸개 절제술 (Laparoscopic Cholecystectomy)와

관상동맥  시술 (PTCA) 입니다.

이들은 기존의 표준 치료법인 개복 쓸개 절제술과 CABG 보다 적은 비용이 들지만

이에 해당하는 수가를 적용받아서 빠르게 수용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여덟번째 요인은 평가 (Evaluation) 입니다.

진료 현장에서 사용하면서 지속 사용여부를 재평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적용할 환자 선정의 용이성과 지속적인 사용 가능성이 주된 요인이라고 합니다.

특히 향후 비교적 쉽게 대체될 것으로 생각되는 신기술의 경우

그로 인해 잘 수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읽은 것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이 글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신의료기술의 도입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가운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중요 요인들, 예를 들어 잘 설계된 연구 결과 같은 것 못지 않게

대중매체를 통한 대중 홍보 같은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는 점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의사로서는 조심스럽습니다만 비지니스에 관심있는 사람으로서는

충분히 고려할 만한 내용이라는 생각입니다.

 

 

One thought on “의료에서의 신기술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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