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의 속성과 의료 비즈니스의 특징

헬스케어 전문가 혹은 헬스케어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헬스케어는 다른 비즈니스와 다르다’

언뜻 생각해도 헬스케어는 뭐가 달라도 다를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뭐가 왜 다른 지를 설명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에서 헬스케어 신사업을 하고자 헬스케어 경력직을 채용했을 때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 힘든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경력직이 헬스케어 사업의 특성을 감안한 사업 계획을 제시하면 대기업 경영진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논의 과정에서 경영진이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면 다행인데 경영진이 대량 생산에 기반한 제조업인 경우가 많은 모회사가 기존에 일하던 방식으로 밀어 붙이는 경우 좋은 결과가 나오기 힘듭니다. 의료가 다른 산업과 왜, 어떻게 다른 지에 대해서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의사라는 대리인의 존재 및 3자 지불 방식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케네스 에로우는 Uncertainty and the welfare economics of medical care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의료 서비스의 특수한 경제적 문제는 질병의 발생 및 치료의 효과와 관련된 불확실성의 존재에서 기인한다. (the special economic problems of medical care can be explained as adaptations to the existence of uncertainty in the incidence of disease and in the efficacy of treatment)

의료 서비스는 필요성이 생겨나는 경우(=질병의 발생)와 그 필요성으로 인해서 가하게 되는 조작의 효과(=치료 효과) 양쪽 모두에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이는 중요한 통찰입니다. 이에 대해 불확실성은 의료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의 한 학자는 복지와 교육 역시 그 효과가 불확실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의료와 복지, 교육 모두 그 효과가 불확실하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하지만 필요성 발생의 불확실성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의료는 개인별 질병 발생 확률 및 발생 시기(=필요성의 발생 여부)가 매우 불확실합니다. 이에 비해 복지는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확률을 비교적 높게 예측할 수 있고 교육은 다수의 인구가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의료의 중요한 속성은 복잡성입니다. 의료의 복잡성은 부분적으로 그 불확실성에서 기인합니다. 현대 과학은 기본적으로 복잡한데 그 중에서도 의학은 과학자가 원하는 대로 실험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설명이 복잡하거나 아직 가설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확실성과 복잡성으로 인해서 의료는 서비스 공급자(의료인)와 수요자(환자) 사이에 정보의 비대칭성이 매우 큽니다. 이로 인해 신용재의 특성을 가집니다. 세상의 모든 제품과 서비스를 분류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로 탐색재, 경험재, 신용재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기준이 되는 것은 경험재인데 사서 써봐야 얼마나 좋고 나에게 잘 맞는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탐색재는 굳이 써보지 않고도 검색하거나 주위에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판단이 가능합니다. 이에 비해 신용재는 써봐도 좋은지 판단하기 힘듭니다.

신용재는 평가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제공하는 공급자의 신용이 중요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신용재라고 할 수 있는 의료에서는 면허제도를 통해 믿을 만한 능력을 갖춘 의료인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게 함으로써 환자들이 이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의사는 “나는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의사이고 환자인 당신은 의료를 잘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니 내가 말하는 것을 믿고 따르시오.”라고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의사 부권주의(medical paternalism)라고 부르며 디지털 헬스케어가 바꿀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습니다. 의료에 관심이 많은 일부 환자와 보호자를 제외한 다수의 사람은 의료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용재라는 특성상 의료는 기본적으로 의사의 진료와 처방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의료의 불확실성과 관련해서 질병의 발생 및 치료의 효과 측면을 언급했습니다. 또 한가지의 불확실성이 있는데 발생하는 질병이 미치는 영향이 천차만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개인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과 이로 인한 의료비 모두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로 인해서 의료 보험의 필요성이 대두 됩니다. 발생 및 그 영향의 불확실성이라는 측면에서 자동차 사고도 비슷한 측면이 있으며 이로 인해서 자동차 보험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료의 불확실성과 비슷한 속성을 가지는 것으로 법적 조력(=변호사)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일반적으로 법적 조력에 대해서는 보험이 없을까요? 의료에 비해서 발생 가능성이 훨씬 낮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질병에 비해서 법적 사건 , 특히 형사 사건은 당사자의 의지 및 노력과 관련이 높아 보여서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는 인식도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신용재라는 특성 때문에 의료에서는 의사라는 대리인의 역할이 중요하며 불확실성으로 인한 위험때문에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 의료보험이라는 제3자 지불방식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두가지 특성 때문에 헬스케어에서는 B2C 비즈니스 모델이 작동하기 힘듭니다. 환자는 스스로 신용재인 의료를 평가하기 힘들기 때문에 의사라는 대리인의 개입이 필수적이고 의료보험이라는 3자가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해주는 구조에서 자신의 돈만을 써서 지불하려는 의지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료 행위의 편차

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불확실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게다가 의사라는 사람이 의학 지식을 진료 행위로 구현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편차가 발생합니다. 단계 별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생각해 볼 점은 진료 행위의 근거가 되는 의학 지식 가운데 많은 부분이 아직 과학적으로 엄격하게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논문에서는 1차 진료 환경의 의학 지식 데이터 베이스에 나오는 항목들에 대한 근거의 과학적 엄밀성을 따져보았습니다. 아래와 같은 3단계로 나누어서 평가했습니다.

A 등급이 가장 잘 입증되었고 B, C 등급으로 갈 수록 엄밀성이 떨어지는데 항목들 가운데 A 등급이 18%, B 등급 32%, C등급이 50%로 나왔습니다. 이 논문에서 평가한 항목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전문가들의 의견 혹은 사례 연구에 바탕을 둔 셈입니다.

의학적 지식 자체가 아직 불완전하다는 것을 넘어서 그 지식을 진료 현장에 적용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변수가 작용합니다. 의학적 지식은 다수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평균적 결과이기 때문에 개별 환자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진료 체계 및 의료 보험과 같은 의료 시스템도 진료 행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진료 체계에 미치는 변수로는 일차 진료 의사가 문지기 역할을 하는가? 입원이 용이한가? 등이 있습니다. 의료 보험 역시 큰 영향을 미칩니다.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약을 선뜻 처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의사 개개인의 성향과 능력 또한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기술에 대한 수용 속도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심근경색 발생 후 베타차단제라는 약물을 사용하는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베타차단제는 심장 박동을 줄여주는 약입니다. 과거에는 심근 경색 발생 후 베타차단제를 사용하는 것을 금기시했습니다. 심장 기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본 것입니다. 근데 1982년에 발표된 임상 시험 결과에서 심근경색 발생 후 베타차단제를 사용하는 것이 생존률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나왔습니다. 이후 나온 연구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오면서 베타차단제 사용은 진료 가이드라인에 반영되었습니다. 하지만 진료 현장에서 심근경색 환자에서 베타차단제를 처방하는 비율은 비교적 서서히 증가했습니다. 연구 결과가 발표된 지 16년이 지난 1998년에도 전체 심근경색 환자의 절반 정도만이 베타차단제를 처방받았습니다. (Better Health Ecoomics 책 참고)

이와 같은 의사 개개인 간의 진료 행위의 차이는 비교적 근거가 잘 확립된 경우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논문에서는 미국 내 5개 지역별로서 근거가 잘 확립된 의료 행위들에 대해서 의사들 간에 진료 행위가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일한 지역 내에서 6개 진료 상황에 대해서 의사들 별로 아래와 같은 차이를 보였습니다.

A, D, F는 실행 비율이 높을수록 바람직한 사례이고 B,C,E는 비율이 낮을수록 바람직한 경우입니다. 그래프에 나오는 데이터 포인트(에러바) 하나하나가 개별 의사의 진료 행위 확률을 의미합니다. 생각보다 의사 간에 큰 차이가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개별 환자들마다 상황에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보험 청구 데이터에 기반한 만큼 데이터의 한계가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여야 겠지만 그럼에도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여기에 또 다른 변수가 개입됩니다. 환자의 인식 혹은 선호도입니다. 미국에서 실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앵글로색슨 백인은 통증에 좀 더 초연한 반면 이탈리아인과 유대인은 통증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호소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순수하게 의료적인 이슈는 아니지만 한국의 산후 조리 문화는 서구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많은 일반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의료가 과학의 영역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의료는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아직 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불완전한 부분이 많으며 실행되는 과정에서 문화, 관습, 제도 및 진료를 하는 의사 개개인의 성향에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이를 비즈니스 이슈로 환산시켜 보면 우선 모든 의료는 로컬 비즈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인허가 제도가 다르고 보험 수가 제도가 다른 정도를 넘어서서 개별 시장마다 차이가 큰 것은 물론 좀 과장하면 개별 의사마다 별도의 시장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제약, 의료기기 업계에서 영업력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품종 소량생산

의료 산업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점입니다. 의학이 복잡하고 다양한 질병이 있기 때문에 개별 상황에 맞는 제품이 시장에 나옵니다. 과거 자료이기는 하지만 의료기기 대기업인 메드트로닉의 최근 파이프라인 제품만 해도 아래와 같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제품을 개발한 후에 인허가를 받고 보험 수가를 받는 것까지 감안하면 비즈니스의 복잡도가 매우 높습니다.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특성으로 인해서 의료 산업 특히 그 중에서도 의료기기 사업은 기존의 하드웨어 혹은 소프트웨어 대기업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몇가지를 만들어서 전세계 시장에 판매할 수 있는 애플 같은 회사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많은 테크 대기업들이 헬스케어 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업의 성격 차이 때문에 본격적으로 헬스케어 사업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참 뜨거운 인공지능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모두 인공지능에 진심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의료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영역의 데이터를 수집해서 매우 구체적인 용도를 가진 제품을 만들어야 하고 이를 가지고 국가별 인허가 및 보험 등재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테크 대기업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구글이나 마이크로 소프트는 방대한 헬스케어 데이터를 자사의 클라우드 플랫폼으로 가져오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헬스케어 산업 업계에 계신 분들은 이미 잘 아시는 내용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업계에서 헬스케어 진입을 고려하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헬스케어 업계 내에 있지만 특정 영역에서만 활동하는 분들(예: 대학병원 교수)의 경우에도 이런 종류의 큰 그림은 잘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있는데 그런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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